



「성실한 사이」 에피소드는 3개의 채널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퍼포먼스 비디오이다. 비디오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옷을 입히는 행동을 반복한다. 옷을 입히고 옷을 다시 벗으며 내팽개치기도 한다. 한 편에는 등을 기대어 물이 가득 찬 세숫대야를 앞에 두고 한 사람이 편안한 자세가 되었을 때 한 사람은 숨을 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마주 보고 서있을 때 두 사람은 배의 힘을 이용해 판자를 지탱하기도 한다. 판자 위에는 수프가 담긴 유리그릇이 놓여있다. 그릇을 번갈아가며 밀어주는 형태로 식사를 시작하는데 한 사람이라도 일정한 힘을 주지 않으면 판자와 유리그릇은 떨어지게 되는 예민한 구조를 유지한다. 옷을 입는 다던가, 세수를 한다던가, 식사를 하는 등 일상적인 지점에서 비롯된 이 익숙하고도 기이한 행동들은 사람과 사람 간에 보이지 않는 거리감을 시각화하는 작용을 하는 장치로서 작용한다. 에피소드마다 포함된 자막은 두 곳에서 빌려온 것이다. 에피소드 1,3의 자막은 어떤 웹사이트에서 ‘제가 예민한 걸까요?’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고민 글이다. 글의 끝에 달린 사람들의 댓글은 글쓴이만큼이나 진지하면서도 그 속에서 남발되는 오타와 틀린 맞춤법, 이모티콘들을 보고 있으면 진지하면서 동시에 가벼운 그 사이를 지켜보는 입장이 된다. 에피소드 3의 자막은 검색만 하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속담이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와 같은 매우 형식적인 이야기가 대조되는 형태로 조용히 흘러나온다.
「성실한 사이」 는 세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영상 작품으로 절친한 친구 관계에 대해 다룬다. 각각의 화면에서는 작가와 작가를 똑 닮은 퍼포머가 상호간에 주고 받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계속한다. 화면의 자막을 통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친구관계에 대한 고민 상담글과 그것에 대한 덧글을 볼 수 있으며, 다른 화면에서는 “공평한 계산이 친구를 만든다.”와 같은 문구들이 열거된다. 상담 글의 화자는 절친한 친구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한 말투로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고민 글에서는 다수의 공감을 받을 만큼의 이기적인 행동을 보이는 친구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화자는 웹이라는 또 다른 공간 속 불특정 다수의 친구들에게 조언과 위로를 받으며 그들의 충고대로 앞으로의 친구와의 관계를 설정한다. 지혜는 이 작업을 통해 인간의 고귀한 가치와 덕목으로 여겨지는 우정에 대해 그리고 진실한 친구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우정 역시 화면속 반복적인 행위와 같이 필요에 의한 교환과 계산적인 행동인 것일까. 한편 또 다른 현실인 웹상의 친구들과는 아무런 보상과 교환 없이 고민과 위로 조언을 나누는 모습이 비춰진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매체를 통해 형성된 관계들 즉, 실체 없이 표면적으로 존재하는 관계들은 이미 익숙한 것이다. 더불어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 된 관계가 실제 시공간의 관계를 넘어서는 현상과 빈번이 마주한다. 이처럼 실제 시공간에서의 교류 없이 매체를 통해 형성된 관계를 실제 관계 보다 하등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플라톤 이래로 우리는 가상과 현실 사이를 구분하고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러나 현재 웹 모바일 등 각종 미디어 상의 시공간은 가상세계나 가짜 세걔라는 정의를 내리기엔 너무 긴밀하게 실제 현실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발렘 플루서가 피상성 예찬에서 언급했듯 가상과 현실은 그저 ‘해상도의 차이’인 것이다.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실제 공간과 미디어 속 공간을 막론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피상적인 관계를 반추하며 되돌아보게 된다. 0차원 이미지로 구성된 시대의 상황 안에서 인간적 가치나 덕목 역시 옅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동시에 피상성의 개념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매체를 거쳐 픽셀과 이미지를 통해 피상적으로 형성된 삶과 관계가 실생활의 그것을 넘어서고 압도하는 경우는 이제 흔히 발견되는 것이며, 때때로 웹 상의 삶과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축적된 에너지들이 현실 보다 현실 같은 결과를 이끌어낸다.
지혜의 작업은 동시대적 방식으로 현재 우리가 소통하고 사고하는 방식과 우리의 본질적인 가치와 덕목에 대한 의문을 받아들여 인정하게 하며 성찰하게 한다. 실제와 가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 짓고 위계질서를 부여하고 판단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유효한 방법론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그에 적합한 삶의 태도 나아가 지혜의 작업과 같이 그것을 예술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시도들이 유의미함을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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