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첫 번째 집에 사는 25년 동안 방 없이 살았다.
한 살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 방이 없었다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개 놀랐다.
그러나 방이 없는 생활은 힘들고 슬픈 동시에 기쁘고 즐거운 모든 감정을 내게 알려줬다.'
20p
이 책은 오랜 세월 자신의 방이 없었던 이가 자신만의 방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머물었던 사람, 머물다 떠난 사람, 차마 오지 못한 사람들이 그의 방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이 쌓이고 쌓여 그의 방은 사면이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는 어둠에 머물러 있지 않고 창을 내어 빛을 들인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용케도 빛을 찾아낸다. 결국 이 이야기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써의 ‘방’을 넘어, ‘마음의 방’을 구축해나가는 견고한 여정이다.
김신식·감정사회학자
단지 기억력만 좋은 사람에겐 ‘어쩜 저런 것까지 떠올릴까?’ 위주의 반응이 따라올 뿐이다. 한편 좋은 작가는 세세히 언급한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다시 말해 좋은 작가란 타인들이 작가의 기록을 접하는 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기억과 감정을 스스로 마주할 수 있게, 작품마다 사색의 공간을 창출해낸다. 그런 맥락에서 지혜는 본 책에서 인간에게 ‘마음의 고향’이란 과연 무엇일까 묻는 여정을 통해, 독자 개개인이 고유한 마음의 고향을 생생히 곱씹어 보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물을 수 있도록 ‘사색의 극장’을 마련한다. 작가는 본인이 체험한 세 번의 이사, 세 곳의 집, 세 사람의 죽음을 바탕으로 마음의 고향을 단일한 형태로 확정 짓지 않은 채 꾸준히 탐색해온 나날들을 페이지마다 상영한다.
이 극장에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삶이란 본디 어떻다고 확언할 수 없다는 작가의 경계심 스민 문장들이, 나와 타자를 좀 더 다채로이 읽어보고픈 의욕의 불씨를 지펴주기 때문이다. ‘존재란 한 가지 표현에 정착하자마자 이내 다른 표현을 기다린다’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철학에 가닿은 지혜의 기록하기 덕분에, 나는 고백할 수 있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즐거움, 좋음과 싫음, 행복과 불행 등 삶을 이루는 서로 상반된 요소가 분리됨 없이 나란히 찾아올 수 있다는 지혜의 시야에 힘입어, 뭘 해도 뾰로통한 요즘 삶이 주는 오묘함에 대해 다시금 흥미를 느끼게 됐음을. 아울러 내가 속한 세계를 향해 여전히 궁금증이 생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지혜의 태도로 말미암아, 어제보단 한 뼘 더 확장된 마음으로 내일의 삶을 들여다보고 겪어볼 용기를 품게 됐음을.




전진우·렉탠글 액자 제작자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
책을 통해 세상을 구경하고, 만나고, 변하는 일에 작가보다는 독자가 더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왔다. 써낸 사람이 겪어야 했을 여러 감정들에서 거리를 두며 여러 책들을 읽어나갈 수 있으니까. "독자가 늘 더 좋아요.” 평소에 그런 말도 자주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작가 역시 자신이 써낸 책 앞에서 한 명의 독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이것이 순수한 자전적 이야기라 할지라도, 책을 써 낸 ‘지혜'라는 사람과 글 속에 등장하는 ‘나’는 분리되어 있다고 느꼈다. 작가는 기억을 더듬어 말하고 있고, 책 속의 ‘나’라고 적힌 한 인물은, 독자가 그렇게 하듯이, 작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있는 중이다. "너는 지혜라는 이름을 가졌다. 엄마가 여럿이 되는 꿈을 꾸고 그러다 어떤 엄마는 죽는다. 바다에 데려가 주는 사람들 속에서 커 나간다. 아빠처럼 조개를 줍고 엄마처럼 편지를 쓰며...” 차분하게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보관해야 할까.
점잖게 몰아치는 삶의 기억들이 담긴 책. 사적인 일들이 가득 적혀 있지만, 작가는 자신만의 문체로 읽는 이들에게 안전한 거리를 만들어 준다. 거기서 슬픔과 편안함이 함께 생겨난다. 이 책은 내게 에세이가 아닌 단편소설처럼 읽혔다. 몇 가지의 사건으로 기억되지 않고 책 전체가 하나의 방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