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강을 보고 앉아 있으면 쓸쓸하면서 홀가분한 기분이 들지.
나는 강을 바라보면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작년 여름에 봤던 칠흑 같은 어둠이 오늘 여기에도 있다.” 1p
그날 부엌에서 복숭아 하나를 씻으면서 사람의 마음이 때로는 무른 과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의 가장 여린 부위는 무른 과일을 닮지 않았을까. 조금만 힘을 줘도 자국이 남고 미끄러지는 것.
다 씻은 복숭아를 잡고 한입 두입 베어 먹을 때마다 복숭아의 즙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2p
꿈을 한창 꾸다가도 내가 꿈을 꿨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살다 보면 정말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의 얼굴도 목소리도 서서히 잊었다.
잘 잊어버리고도 잘 기억해 냈다. 살면서 그런 걸 여러 번 했다. 6p
“그때 나는 무엇을 버리고자 했을까.
그때 버리고 싶었던 사람과 습관과 마음과 감정과 물건들은 지금도 내가 버리고 싶어하는 것들일까.
그때 비우고 싶어 했던 것이 아직 내게 남아 있나, 아니면 이미 사라지고 없나.
다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알게 된 것은 내가 버리지 않아도
스스로 사라지는 게 더 많다는 것이었다.” 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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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혼자서 걷는 밤에」
「할 일이 없지만 잠들지도 않는 밤에」 특집은 일몰 뒤 일출 이전의 시간 사이에 일어나는 것들을 모은 총서입니다. 읽다가 잠들면 기분 좋은 단잠을 자게될 글을 10명의 작가들이 적었습니다. 푹신한 밤, 아득한 밤, 외로운 밤, 무수한 밤, 늙는 밤, 감당하는 밤, 타인의 밤, 필연적인 밤, 기다리는 밤, 그리운 밤들이 모여 누군가의 긴 밤을 채우길 바라면서요. 밤 잠을 설치며 보는 화면 대신 읽을 수 있는 수첩만한 크기의 책입니다.
참여 작가• 강민선• 김나연 • 김목인• 박선아• 서한나• 오지• 임소라• 임진아• 지혜• 최리외